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키모토 야스시 (문단 편집) === 아이돌 프로듀서로서 === [[오냥코클럽]]과 [[AKB48]]이라는 이름이 너무 커서 마치 신처럼 여겨지지만, 오냥코는 위에도 써있는 것처럼 작가진의 일원이자 작사가로 참여한 것이라 종합 프로듀서로 관여하는 AKB48과는 다르다. 아키모토 본인은 오냥코클럽은 공동 작업이며 자신이 주도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냥코클럽의 멤버였던 고쿠쇼 사유리는 "구성 작가였던 아키모토씨는 스태프의 일원이었고 좋은 의미로 다른 스태프들과 동급에 있었다"라고 얘기하였다. 아키모토가 프로듀스해서 말아먹은 그룹도 많은데 오냥코의 남자버전이었던 무슷코클럽, 초등학생으로 이루어진 네즈밋코 클럽, 2001년 '판치라 아이돌'이라는 해괴한 콘셉트를 들고 나온 [[추정소녀]] 등이 그것이다. 아키모토가 프로듀서는 아니었지만 기획 성립에 큰 역할을 한 90년대 말의 [[체킷코]]도 쫄딱 망했다. 최근의 성공으로 이런 것들은 전혀 어필되지 않지만 그는 성공만큼이나 무수한 실패를 기록한 사람이다. [[AKB48]]은 아키모토 야스시가 [[2005년]] 직접 [[도쿄]]의 [[아키하바라]]에 근거지를 두고 책임 프로듀서로써 역임, 전용극장을 만들어 '''매일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을 표방하였다. 당시의 [[아키하바라]]는 사회 현상을 불러 일으킨 서적 '[[전차남]]'에서 그려진 [[메이드 카페]], [[미소녀]] 게임과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로 인지되어 [[AKB48]]을 아키바에서 통용될 '[[모에]] [[아이돌]]로 키우려고 했었다. 하지만 데뷔 이후 [[AKB48]]의 [[지하 아이돌]]적인 상태는 장년 간 지속되었다. 마이너한 구성과 오타 성향의 걸그룹에 대중들이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던것. 하지만 [[2008년]] 싱글 '[[오오고에 다이아몬드]]'로 인기가 상승, [[2010년]]이후로는 발매되는 CD마다 100만 장을 돌파하는 국민적인 아이돌이 되는 길을 이끌었다.(자세한 설명은 [[AKB48]] 문서 참조.) [[2013년]]의 인터뷰엔 장래에 [[AKB48]]의 프로듀서에서 물러남을 시사하였다. 그의 프로듀서로서의 철학은 '다른 사람이 생각이 들어도 절대로 실행에 옮기지 않을 것을 하자!'라고 한다. 또한 모든 것을 엔터테인먼트적인 관점으로 보려고 하고 있다. 이래서인지 엔터테인먼트적인 관점에서 프로듀싱 능력은 따라올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히 여돌계의 끝판왕이자 절대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모닝구 무스메]]의 프로듀서 [[층쿠]]는 "(아키모토의 엔터테인먼트적인 기획에 대해) 너무 잘 알게 되면 좋은 게 있다면 흉내내고 싶어진다. 때문에 그다지 잘 알지 않도록 하고있다. 하지만 과거의 다양한 경험 위에서 이번을 만들어낸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음악을 만들 뿐만 아니라 그런 분야를 만들어간달까. 점을 찍는다기보다는 자리를 만들었달까."라고 언급했다. 참고로 AKBINGO!에서 AKB 오리멘(1기생)들이 말하길, 만약 아키모토 야스시가 프로듀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오디션에 응모하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이유는 뭔가 수상해서. 그리고 1기생 [[미네기시 미나미]]는 오디션 관련 정보지를 보다가 부모님이 AKB 오디션 광고의 아키모토 야스시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 굉장한 사람이야'라고 말한 것을 계기로 당시 어떤 그룹인지도 알 수 없었던 AKB48의 오디션에 지원했다고 한다.[* 사실 이런류의 에피소드는 AKB 맴버들의 오디션 에피소드에서 꽤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시마자키 하루카]](a.k.a. 파루루)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오디션 1차 심사에 합격하자 어머니께서 "너는 춤도 노래도 안되는데 합격할리가 없다. 그런데 합격시키는걸 보니 사기인거 같으니 2차 오디션 심사위원중에 아키모토 야스시가 없으면 곧장 도망쳐라."라고 했다고. --다행히 아키모토가 심사위원석에 있었다고 한다--] [[구글 플러스]]에서 [[AKB48]] 멤버들과 교류를 하고있는데 자기 자신을 '야스스'라고 부르며 절찬 개드립 중. 관련 정보를 말해 놓고는 '말하면 안되는 거였나'같은 발설을 하지만 위에 나와있듯이 이 사람은 고교생때부터 방송계에서 일해온데다 나이도 60이 다되가는 베테랑이다. 그러므로 저런말을 해도 아무도 안 믿는다. '''[[카시와기 유키|유키링]]이 직접 유출 좀 제발 그만하라고 ~~돌려서~~ 구플에 [[https://plus.google.com/u/1/109547251260290757268/posts/QnvQiNB79y8|쓸]] 정도면 말 다 했다.''' 구플에서는 카미7멤버들과 비견될 정도로 인기를 (...) 끌고 있는데, 멤버들과 장난을 치거나 멤버들 소식을 알려주거나 하는 친근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어서이다. 팬들은 아키P에 대한 애증이 쌓이고 쌓인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고 돼지라고 부르며 까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아이돌 마케팅에는 도가 트인 사람은 맞다. 프로듀서로서 아키모토 야스시는 대단히 엄하다고 한다. 스탭들이 아키모토에게 어떤 일에 대해서 검사받으러 올 때는 일주일 전부터 마음이 무겁다고 할 정도이다. 어떤 공을 던져도 쳐버리는 타자를 상대하는 느낌이라고. 한 싱글 자켓을 결정할 때는 스탭들이 20패턴의 아이디어를 들고 왔지만 전부 퇴짜를 놓았다고 한다. 또한 콘서트나 공연등에서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있으면 얄짤없이 쓴소리를 하는데 그 예로는 [[AKB48]] 및 자매 그룹의 '''노래 총선거'''라고 불리는 리퀘스트 아워가 2013년 1월 24일부터 27일까지 4일간 개최되었다. 그런데 아키모토는 첫 날 영상을 보고 자신의 구글플러스에 [[https://plus.google.com/u/0/113474433041552257864/posts/3TtNz3ix7Xc|이 영상이 '''최악'''이라는 평]]을 내렸다. 특히 강운 최강자를 뽑는 과정에서 선발된 [[카와에이 리나]]가 벌칙에 걸려[* 자신들 말로는 이 최강자가 [[타카하시 미나미|총감독]]보다 높은 지위라고 한다(...)] 스티로폼 공 같은 것에 파묻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버라이어티의 정석인 흰 가루가 아니라는 것을 깠다. 왜 밀가루 대신 스티로폼이 나왔냐면 카와에이가 또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화장이 지워질까봐. 하지만 아키모토는 얼굴이 하얀 상태로, 그러니까 정말 아이돌 본연의 모습을 한 채로 노래를 불러도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체 각 부위에 만보계를 붙이고 몸을 떨어 그 횟수를 세는 경기는 낡았다고 깠다. 중간에 중계를 한 [[이치카와 미오리]][* [[레몬]]을 뒤집어 쓰고 했다.]도 리퀘스트 아워랑 관계없다고 깠다. 근데 그래놓고 결론은 노래 총선거니까 노래를 더 보여달라고 했다. 보통 [[뮤직비디오|PV]]란 건 일단 그 곡의 내용에 따라 만드는 게 정석이라서 일단 곡이 한 달 전에 나오고 그걸 한 달 동안 생각해서 곡에 맞는 뮤직비디오를 찍는 게 상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AKB48]]에게는 상식이라는 게 없다고(...) 보통 PV 촬영 '''열흘 전'''까지 미술, 의상, 촬영장소는 커녕 노래, 가사조차 완성되어 있지 않은게 허다하다고 한다. 심지어는 '''6일 전'''까지 이런 경우도 있었다고. PV촬영 각본은 감독이 노래를 들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짠다고 하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대개 안무, 가사, 음원은 '''빠르면''' PV 촬영 '''전날''' 완성되고 상황이 나쁠 때는 촬영이 시작하고 오후 쯤에 가사가 올 때도 있고, 더더욱 나쁠 때는 아예 가사가 오지가 않아서 촬영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진다고 한다. 보통 사람은 무난하게 넘어가고 싶어 하지만 아키모토 야스시는 아니다 싶으면 기한이고 뭐고 전부 뒤집어엎는다고 한다. 심지어는 촬영 중간에 가사를 수정하기도 한다고 한다. 싱글의 타이틀 곡과 커플링 곡을 정할 때는 500곡에서 1000곡 정도를 듣는다고 한다. 주로 회의가 끝난 새벽 1, 2시 쯤까지 작업실에 있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원고를 쓰기 때문에 6, 7시는 되어야 하루가 끝난다고 한다. 거의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 본인은 '해야 할 때가 인생에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때 필사적으로 할지, 일로서 이런 거겠지 하고 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필사적으로 한다는 걸 추구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2020 도쿄 올림픽]] 조직위원회 이사'''로 임명되었다.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이 애들 프로듀스나 극장 공연 챙기지는 않고 뭐하는 짓이냐고 팬들에게 대차게 까이는 중. 또한 이 사람이 조직위 이사를 담당한 것은 2020년 도쿄 올림픽에 [[AKB48]]을 등장시키기 위해서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에 [[EXO]]와 [[CL]]의 출연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충분히 할 수 있을 법한 일이기는 하다. 아직까지는 일간지 레벨의 루머지만, 아키모토 야스시 본인은 올림픽에 [[AKB48|AKB]]를 내보낼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여담이지만 그가 AKB48를 만들고 나서 단발성애자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에다 아츠코]]가 시작이었는데 일본에서 『오캇파 머리』 라고 하는 마에다 아츠코의 초창기 머리스타일에 강하게 꽂혔다고 한다. 다행히 SKE48 [[마츠이 쥬리나]]는 그다지 단발이 아니었으나... NMB 2기생 [[죠 에리코]] (그가 제2의 마에다라고 극찬했던 재능) , 노기자카 46의 [[이코마 리나]] , AKB48 센터를 하던 시절의 HKT48 [[미야와키 사쿠라]], 케야키자카46의 [[히라테 유리나]] 등 그가 밀었던 센터 멤버에는 단발멤버가 많았다. NGT48 첫 오리지널곡의 센터가 [[타카쿠라 모에카]]가 된 것으로 그것은 확정적으로 바뀌었다. 또한 자신이 프로듀싱한 곡이 부르는 멤버의 나잇대와는 동떨어진 경우가 종종 있다. 10대 멤버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48그룹 중에서는 대담하게 무릎에 앉아 입술로 초콜렛을 나눠먹는 노래 (口移しのチョコレート), 원나잇 (ダウンタウンホテル100号室), 원조교제 (Dear My Teacher, 制服が邪魔をする) 등과 같은 노래들이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특히, Innocence가 수록된 [[手をつなぎながら]] 공연의 경우 가사가 너무 엄해서 나이가 어린 일부 멤버가 출연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엔 2차원 아이돌 프로듀서를 맡는다.[[http://bbs.ruliweb.com/family/211/board/300015/read/2111734?|정보]] 2차원 아이돌 명칭은 '''[[22/7]]'''이다.[[http://m.ruliweb.com/hobby/board/300015/read/2117087?|#]] 2005년 시작된 AKB48가 16년차가 되면서 아키모토가 직접 관리하던 시절의 AKB의 멤버가 많이 졸업했다. 2017년 기준 아키모토 야스시의 작사가 필요한 그룹이 [[AKB48]] , [[SKE48]], [[NMB48]], [[HKT48]], [[NGT48]], [[STU48]],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 까지 1년에만해도 가볍게 150곡 넘게 써야한다. 예전 AKB는 유닛이나 극장곡으로 AKB만으로 1년에 100개의 곡을 만들어줬다. AKB에 주로 힘을 쏟고 자매그룹에도 일정의 퀄리티를 유지해주었다. 하지만 최근 AKB에는 AKB에만 힘을 줄 수도 없고, 잘 나가는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 등도 유닛이나 솔로곡도 챙겨줘야한다. 그야말로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지경. 그로 인해서 AKB에만 온전히 힘을 쏟지 못하고 있고, 최근 AKB 팬들에게는 AKB에 주는 곡이 너무 안 좋다는 욕을 먹고 있다. 아키모토가 기계가 아닌 이상 몇천 곡을 만들었으니 매너리즘에 빠질 만도 하다.[* 일각에서는 AKB에 대한 애정이 떨어져서 구린 곡을 주는 게 아니냐라는 의견도 있다.] 2017년 9월 BSP 100년 인터뷰에서 "지금 현재 100개의 일을 동시에 하고 있어서 잠은 3시간밖에 못 잔다"고 한다. 이게 큰 문제인 게 본인도 지쳐서 문제이지만, 48그룹 쪽의 악곡 퀄리티는 최근 4~5년 동안 점점 안 좋아지고 있는데 본인이 독점하니 문제다. 2010년 AKB48의 대히트로 시작된 아키모토 야스시발 아이돌 붐도 2020년대 들어 무너지는 중이다. 이미 인기가 다 빠져버린 AKB48과 그 자매그룹들은 말할 것도 없고, 노기자카46은 팬덤과 대중 인지도는 크지만 히트곡은 없는 신세를 8년째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케야키자카46은 초기의 역대급 기세에도 불구하고 고질적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개명 및 재데뷔라는 길을 걷게 되었다. 히나타자카46도 기존 팬덤을 기반으로 할 뿐 대중적인 인지도는 아직 모자라다. 성우 아이돌 미디어믹스 프로젝트인 22/7은 그야말로 망했으며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시작한 아이돌 [[라스트 아이돌]]과 선발제 걸즈밴드 더 코인로커즈도 별 반응이 없이 흐지부지 해산하였다. 아키모토 야스시 본인의 아이돌에 관한 흥미도 예전같지 않아 앞으로도 문제가 해결되는 일은 요원할 듯.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